연암(蓮庵) 구인회 회장의 국민을 위한 끊임없는 도전,
LG의 초석이 되다

연암 구인회 창업회장

1947년, 해방 후의 척박한 사회 환경 속에서 LG의 모태인 락희화학이 설립되었다. 이후 연암 구인회 회장은 인화와 개척정신, 그리고 국리민복의 일념으로 기업을 일으켜 20여 년 간 한국 경제발전에 큰 밑거름이 된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산업화 초창기에 개척한 플라스틱 사업과 정유 사업, 통신·전선 사업, 전기·전자 사업은 이후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다. 연암 구인회 회장은 황무지 같은 우리나라 산업계에 미래의 등불을 밝힌 개척자요 선구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연암 구인회 창업회장

“아니,엄격한 유교 집안의 장손이 장사를 하겠다는 말이냐?”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 고향인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산리에 내려와 있던 25세의 청년 구인회가 사업을 해보겠다는 결심을 내비치자 유학을 숭상하는 집안의 반대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심사숙고하던 조부 만회 공은 부친 춘강 공과 의논 끝에 집안의 장손으로서 세상의 무게를 감당하고자 결심한 구인회의 사업의지를 허락한다. 부친은 백지에 차곡차곡 싸두었던 돈을 내놓으며, “내 형편으로 더는 못 주니 가서 네 생각대로 잘해보거라. 세상을 얕보지 말고, 남하고 화목하게 지내면서 신용을 얻는 사람이 되어야 하느니라. 나는 너를 믿는다”라며 격려한다.

1907년 8월 27일 춘강 구재서 공과 진양 하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구인회의 어릴 적 이름은 정미(丁未)년에 옥동자를 얻었다는 뜻의 정득(丁得)이었다.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인 만회 구연호 공으로부터 한학을 지도 받은 정득은 어릴 때부터 의리에 강하고 우애가 있으면서도 장난기가 많았다. 지수국민학교를 다니며 농작물을 기르던 시절에는 관련 서적을 읽으며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모르는 것은 학교 교사에게 캐묻는 도전정신과 연구기질을 드러내기도 했다.

1931년 7월 청년 구인회가 집안의 지지를 등에 업고 사업가로서 첫발을 내딛은 것이 당시 유행과 소비의 도시였던 진주에서 간판을 내건 구인회상점이었다. 그러나 야심차게 시작한 포목점 사업은 첫해부터 쓰디 쓴 실패를 맛보게 된다. 작은 규모로 기존의 거대한 업체들과 경쟁하다, 사업 첫 해에 무려 쌀 백 가마가 넘는 금액인 5백 원의 손실을 본 것이다. 그럼에도 부친은 “초반에 일이 잘 안 된다고 주저앉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무슨 일이든 10년은 해봐야 결판이 나지 않겠느냐”며 멀리 내다볼 것을 당부했다.

연암 구인회 창업회장

시대를 뛰어넘은 고객가치 경영의 시작

포목상을 하면서 구인회는 포목을 대량으로 싸게 구매해서 이윤을 남기는 것보다 손님들의 취향에 더 관심을 가졌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상품을 제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게에 드나드는 손님들과 더 많이 대화하고 계절별로 다른 질감, 무늬가 예쁜 옷감을 갖고 싶어 하는 고객 취향을 파악하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그 결과 내놓은 다양한 두께의 비단, 수를 놓고 무늬를 염색한 비단과 인조견직물은 고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는다. 남이 생산한 물건을 받아다가 팔기만 하는 소극적 장사에 만족하지 않고 광목에 무늬를 박는 날염과 비단에 문양을 넣는 문직을 고안했다. 이러한 제품 혁신을 통해 구인회상점에서만 구할 수 있는 제품 수를 늘려나갔고, 그것이 바로 사업 성공의 비결이었다. 1938년 6월 주식회사 구인상회로 상호를 바꾼 구인회는 사장에 취임했다. 이어 해방 전까지 진주를 거점으로 청년 구인회는 사업가로서 필요한 다양한 경험과 역량을 축적하며 성장하였다.

광복을 맞이한 1945년, 39세의 사업가 구인회는 진주를 떠나 부산으로 사업무대를 옮겼다. 더 큰 사업을 찾아 집념과 도전의 대장정을 시작하기에 진주보다 부산이 적당했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생활필수품이 태부족이라 무엇보다도 물자의 확보와 공급이 민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무역을 통한 물자 유통의 필요성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구인회는 조선흥업사라는 무역회사를 군정청 무역업 허가 제1호로 설립하였다. 부산에서 시작한 조선흥업사는 사돈 허만정 공의 부탁으로 합류한 허준구와 철회, 정회 두 아우와 함께 화장품 유통, 판매업으로 성장하였고 서울까지 시장을 넓혀갔다.

조선흥업사를 설립한 지 2년이 지난 새해 벽두, 구인회의 자택 마당 한쪽에 있는 공장에 집 주인 구인회와 동생 구정회, 허준구, 큰 아들 구자경과 몇몇 친지들이 모였다. 이들의 눈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화장품 기술자 김준환의 손놀림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원료를 배합하여 반죽을 하고, 이것을 다시 감화조에 넣어 끓이는 등 복잡한 공정을 능숙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기대감과 불안감이 뒤섞인 눈길은 마침내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쏟아져 나오는 화장크림을 본 순간, 환호성과 박수로 바뀌었다.

“봐라! 신기하기도 하다. 저게 우리가 만든 크림이다.”

화장품 사업을 확장하면서 구인회는 제조와 원료의 중요성을 절감하였고, 그때까지 번 돈 거의 전부를 털어 넣어 화장품을 직접 제조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구인회가 제조업 기업인으로 첫발을 내딛은 이날의 환호는 LG의 역사적인 출범을 알리는 신호였다. LG의 모태가 되는 락희화학공업사는 이렇게 1947년 1월 5일, 부산시 서대신동 3가 513번지 300여 평 대지에 건평 70평이 되는 구인회 회장의 집에서 자본금 300만 원, 종업원 20명 규모로 창립되었다. 1대 사장으로 동생 구정회를 등기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구인회가 모든 일을 총괄했다. 제품은 단 한 가지,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여성용 화장품 ‘럭키크림’이었다.

락희화학공업사는 작은 가족회사로 시작했지만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공급하겠다는 고객 관점의 사업 철학은 확고했다. 화장품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주원료 가운데 하나인 향료는 해방 후 외국 무역이 끊긴 탓에, 마카오에 본사를 둔 중국인 무역상 하나가 유일한 구입 통로였다. 그런데 밀수되고 있던 일제 향료에 비해 향기의 수준이 매우 낮았다. 구인회 사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제 크림에 견줄 수 있는 국산 크림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한결같이 영세한 국내 기업이 원료를 직접 수입한다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집념의 구인회는 정부기관인 외자구매처를 뛰어다닌 끝에 일본의 향료제조회사 주소록을 입수하는 데 성공한다. 자료를 검토하여 10개 일본 회사에 견본과 가격을 보내달라는 서신을 발송했으나 감감무소식이었다. 구인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 반응을 보일 거라는 생각에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서신을 보냈다. 두 달쯤 지나자 드디어 일본의 다카사고와 시오노라는 두 향료회사에서 회답과 함께 견본품이 왔다. 마카오 향료보다 절반이나 싼 가격에 품질은 월등히 좋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즉시 시오노 향료회사와 거래를 튼 락희화학공업사는 싸고 좋은 럭키크림을 생산하여 국내 화장품계를 휩쓸기 시작했다.

구인회는 여기서 남이 하지 않은 일,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일로써 소비자에게 더 좋은 제품,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어떤 일에서나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큰 교훈과 용기를 얻었다. 훗날 좋은 품질에 값이 싼 럭키치약이 시장에서 성공하였을 때, 값을 올리자는 의견에 대해, “소비자들이 우리 물건 잘 사준다고 값을 왕창 올려 받을 건가? 이것은 우리 럭키와 소비자 간의 약속이요, 얼마 안 남아도 좋으니 봉사한다는 자세로 하다 보면 우리 럭키의 신용이 소비자의 머릿속에 남게 되고, 결국 그것이 우리가 버는 거 아니겠는가?”라며 보다 멀리 내다볼 것을 주문하였다.

국내 최초의 합성세제 하이타이의 개발도 우리나라 주부들이 더 쉽고 편하게 빨래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고객 관점의 산물이었다. 당시 락희화학은 이미 빨래비누로 재미를 보고 있던 터라 굳이 새로운 세제를 개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소비자의 편익 관점에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구인회 사장의 지시로 1966년 경기도 안양에 한국 최초의 합성세제 공장이 세워졌다. 이때 생산된 제품 하이타이는 이내 합성세제의 대명사가 되었고 주부들의 빨래 노동 강도를 줄이는 데 한몫을 했다.

“남이 안 하는 일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되, 어디까지나 국민경제에 유익하고 소비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구인회의 소비자 편익과 고객 중시 정신은 고스란히 최초의 제품 개발 혹은 국산화 성공으로 이어졌다. 치약과 비누, 합성세제뿐만 아니라 비닐하우스용 비닐과 비닐장판, 그리고 폴리에틸렌을 사용한 그릇이나 양동이 등 가볍고 깨지지 않으며 값싸고 예쁜 플라스틱 제품들은 국민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와 같이 고객을 먼저 생각하는 경영 철학은 LG그룹이 구인회가 타계한 1969년까지 불과 23년 만에 럭키, 금성사 등 8개 회사, 총 매출액 349억 원, 자본금 60억 원, 순이익 8억 원에 종업원 2만 명을 거느리는 대그룹으로 성장하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되었다.

연암 구인회 창업회장

더 높이 날고 멀리 보다

1951년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플라스틱 사업을 검토하던 구인회는 “이런 사업이 우리가 해야 할 진짜 사업이라는 생각이다. 지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민의 생활필수품은 절대 부족한 실정 아닌가 말이다. 생산업자가 국민의 생활용품을 차질 없게 만들어내는 일도 애국하는 길이고 전쟁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되는 길이다. 그리고 기업하는 사람으로서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손대지 못하는 사업을 착수해서 성공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인가”라는 신념을 확고히 한다.

플라스틱을 주력 사업으로 결정한 이후 1952년 알마이트 가공업과 합성수지 가공업을 주업종으로 설립된 동양전기화학공업사는 국내 최초의 플라스틱 빗을 출시하였다. 빨간색의 곱고 앙증맞은 모양에 ‘Oriental’이라는 상표가 선명히 찍혀 있던 플라스틱 빗은 45초 간격으로 하루 350개 정도 생산되었는데, 시장에서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먼저 물건을 받으려는 상인들은 연일 장사진을 이루었고, 물건을 싣고 가다 외국산 밀수품으로 오해받아 곤욕을 치르는 도매상도 있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국산 기술로 만든 빗을 보고 받고 나에게도 하나 줄 수 없느냐고 말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로, 당시 우리나라의 공업기술 수준에서 획기적인 물건이었다.

1965년 정월 초순, 구인회에게 프로젝트 건의서가 하나 올라왔다. 락희화학의 숙원인 플라스틱원료의 계열화를 제안하는 석유화학 사업 검토 보고서였다. ‘멀리 보고 높이 날자’며 새로운 사업 검토를 지시했던 구인회였지만, 민간 기업으로서 우리나라 산업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파급하게 될 석유화학 사업을 해보자는 의견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흔히 비닐이라고 부르는 폴리에틸렌을 만들려면 에틸렌을 만들어야 하고, 에틸렌은 석유화학 원료인 나프타에서 나오는데 나프타는 원유가 정유 과정을 거칠 때 나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합성수지의 원재료가 만들어지는 첫 번째 공정인 정유과정부터 손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만 해도 민간 기업이 석유사업에 손을 뻗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마침내 구인회는 “석유사업이라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성패가 불투명하고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산업의 미래를 위해 뜻있는 사업이 틀림없으니 도전해봅시다”라며 결론을 내렸다.

1966년 5월 제2정유공장 사업자 공모가 시작되자 락희화학은 장안의 내로라하는 기업들과의 각축전을 벌인 끝에 결국 미국 칼텍스와 합작하기로 한 호남정유를 내세워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이듬해인 1967년 호남정유 여수공장 기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 터커 칼텍스 부사장 등이 참석하였다. 시공발파 단추를 누르는 구인회는 찬란한 햇빛 아래 훤히 트인 여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이편 산을 저미고, 저편 개펄을 골라 마술처럼 우뚝 들어선 현대식 공장들과 산더미 같은 저유 탱크며 하늘을 찌르는 굴뚝들은 우리 민족의 기상 같았다. 그리고 거미줄처럼 얽혀 뻗어 있는 파이프라인들이 겨레의 심장과 핏줄처럼 느껴졌고 뛰고 있는 맥박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국내 민간업체로서 외국자본과 합작한 최초이자 최대의 회사가 된 호남정유는 이때부터 지금까지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아무도 안 한 거라면 우리가 해보는 거다

구인회의 도전과 개척정신이 더욱 빛을 발한 건 국내기업으로 처음인 전자공업에 뛰어들 때다. 1957년 구인회는 우연히 당시 기획실장 윤욱현과 외제 하이파이 전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전축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들은 구인회는 “그거 우리가 한번 만들어보면 안 되는 거요?”라며 의중을 밝힌다.
기술 수준이 낮아 어렵다는 말에 오히려 “그렇다면 문제없구먼. 기술이 없으면 외국 가서 배워오고, 그래도 안 되면 외국 기술자 초빙하면 될 거 아니오. 우리가 한번 해봅시다. 그거 한번 해봅시다.
아무도 전자공업 손댄 사람이 없다면 우리가 개척자가 되는 것이요”라며 맞받아쳤다. 아직 국내에선 아무도 엄두를 못내고 있던 전자공업 개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라디오 사업 준비를 지시 받은 당시 락희화학 내부 임직원들조차 회의적인 시각이 팽배했다. 미군 피엑스에서 하루에 수백 대씩 라디오가 흘러나오고 있는 판국에 무슨 재주로 생판 모르는 분야에 뛰어들어 경쟁하겠느냐는 것이었다. 더구나 락희화학은 플라스틱 사업만으로 이미 적지 않은 수익을 올리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구인회의 결단은 단호했다. “무서워서 앞장서지 못한다면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는 거요.” 플라스틱 산업은 단순 가공업으로 향후 군소업자들과 출혈경쟁이 불가피하고 새로운 기술집약적 업종개발이 어렵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더구나 미래 사업으로 전망되던 전자공업으로 국리민복(國利民福)에 이바지해 보자는 뜻을 품고 나니 이미 가지고 있는 플라스틱 기술과 설비도 큰 이점이 될 수 있었다.

1958년 10월 1일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전자공업회사로 금성사가 출범하였다. 금성사는 1959년 ‘골드스타(GoldStar)’라는 상표를 부착하고 최초의 국산 라디오 A-501 제품을 내놓았다. 이어 선풍기, 흑백TV, 냉장고, 에어컨 등 주요 가전제품들의 최초 국산화를 차례로 이끌면서 국민생활의 모습을 하나둘 바꿔나갔다. 금성사는 해외시장 개척에서도 선구자였다. 1962년 6월, 락희화학 산하의 반도상사를 통해 미국에 라디오 2개 모델 62대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리비아,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 지역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중동지역으로 금성 라디오가 뻗어 나갔다.

연암 구인회 창업회장

스스로 연구하고 끝까지 개발한다

락희화학공업사의 화장품 사업은 구인회 사장에게 한 가지 고민을 안겨주었다. 화장품 통 뚜껑이 절반 이상 깨지고 크림이 쏟아져 흘러서 팔 수가 없다는 도매상의 항의가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품질관리에서만은 그 누구보다 철저했던 구인회였기에 더 속이 상했다. “보래이, 가령 크림 백 통 가운데 불량품 한 통이 섞여 있다면 다른 아흔아홉 통도 모두 불량품이나 마찬가진 기라. 아무거나 많이 팔면 장땡이 아니라 한 통을 팔더라도 좋은 물건 팔아서 신용 쌓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그들은 와 모르나”라며 볼멘소리를 하는 아우들을 타일렀던 터라 이제 깨지지 않는 크림통 뚜껑은 지상과제가 되었다. “안 깨지는 뚜껑 좀 누가 한 번 연구해볼 수 없나? 이거 속상해서 해먹을 수 있느냐 말이다!”

속이 상해 내뱉었던 구인회 사장의 이 한 마디는 훗날 락희화학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어느 날 구인회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견고한 크림통을 보게 되었다. 그 물질이 플라스틱이라 불리는 합성수지라는 것을 알게 되자 즉시 구태회 전무를 불러 다른 일은 다 그만두고 플라스틱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구인회 본인 스스로도 당시 일본으로부터 플라스틱에 관계된 책 6권을 입수하여 탐독하고는 플라스틱 산업의 유망함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합성수지에 대한 연구는 락희화학의 주력사업을 화장품제조에서 플라스틱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1955년에는 락희화학 연지동 공장이 신축되면서 ‘럭키’ 상표를 부착한 치약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럭키치약은 완벽한 제조공법을 공여 받아 제조한 것이 아니었다. 토막정보를 모으고 기술을 하나둘씩 깨쳐가면서 오직 하면 된다는 의지 하나로 순수 국산 치약의 개발에 성공한 것이었다. 당시의 치약시장은 미제 콜게이트가 휩쓸고 있었고 국산은 종이봉지에 담긴 가루치약이나 조악한 튜브치약이 전부였다. 플라스틱 빗에 이어 칫솔을 만들어내면서 치약 개발에 대한 준비를 남몰래 해오던 차였지만, 콜게이트에 견줄 만한 치약을 개발하겠다는 일념만 있을 뿐, 어디서 어떻게 기술을 익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구인회는 태회와 평회 두 아우에게 외국 참고서적과 자료들을 최대한 입수하게 하여 공부를 시키는 한편, 콜게이트 치약의 성분분석과 제조과정 습득에 전념하였다. 밤을 지새우는 연구개발이 수개월간 지속되었으나 습도제와 배합비율, 기포제 첨가, 감미제, 향료, 색상 등 기술적 난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쉽게 생각했던 튜브 제조 문제는 구인회가 조선알마이트 공장운영 시절 눈여겨보았던 도금기술과 기술자들로부터 얻은 단편 조언으로 냉간압착이라는 튜브 코팅기술을 개발하고 나서야 풀렸다. 하지만 치약 품질 개선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첩첩산중이던 국산치약 개발 문제로 고민하던 때, 마침 아우 구평회가 국제청년상공인회의 참가 차 멕시코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구인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특명을 받은 구평회는 멕시코 일이 끝나고 곧장 뉴욕으로 날아가 수소문 끝에 콜게이트 회사를 찾아 자료 입수를 타진했다. 회사 기밀이라며 한마디로 거절당했지만, 구평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몇날 며칠을 콜게이트 외곽의 연구소와 납품업자들을 찾아다니며 치약제조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수집하여 정리했다. 미국에서 보내온 자료로 사기가 충천한 락희화학 연구진은 곧바로 시험제작에 들어갔다. 배합비율 등을 수없이 바꾸고 조정하며 거의 일 년 가까이 실험을 거듭한 끝에 만들어져 나온 치약은 콜게이트와 거의 똑같을 만큼 훌륭했다.

그러나 구인회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버터 먹는 사람과 김치 먹는 사람의 치약은 달라야 할끼다.
우리 기호에 맞는 제품을 만들어 보자.” 우리에게 맞는 맛과 향기를 찾기 위해 사이다, 비누, 껌 등 다양한 물질을 분석하고 향료회사와 접촉한 끝에 톡 쏘는 맛과 은은한 맛의 중간에 해당하는 럭키치약 고유의 맛을 만들 수 있었다. 럭키치약이 미제 콜게이트를 몰아내고 시장의 선두를 달리며 국민치약으로 인정받게 된 데에는 이처럼 눈물겨운 연구개발의 노력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연암 구인회의 삶과 철학

오늘날 LG의 사훈으로 표명되고 있는 인화단결(人和團結)은 사실 구씨 집안의 가훈이다. 구인회는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허씨 집안사람들은 물론 구씨 집안 형제와 2세들로 복잡하고 다양하게 이루어진 인적구성을 잘 이끄는 비법이 인화단결임을 체득했다. 그러나 일가친척이라 해서 특혜를 주어 중요한 자리에 곧바로 앉히는 법은 없었다. 누구나 밑바닥에서부터 철저히 배우고 경험을 쌓으며 능력을 입증해야 등용되었다.
특히 유교적 가족주의 공동체사상이 강했던 탓에, 장남 구자경에게 “본시 맏이란 고된 법이다. 남들은 놀아도 맏이는 놀 새가 없고, 묽은 걸 알고, 된 걸 알아야 남을 다스려 나갈 거 아니냐. 너는 아버지를 대신할 책임을 명심해야 한다”라며 장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구인회는 낭비하지 않고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구두쇠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필요한 곳에는 쓰는 돈에는 아낌이 없는 대인배였다. 럭키치약이 미제치약을 물리치며 시장을 석권해나가던 시절 락희화학은 서울의 반도호텔 빌딩에 있는 사무실로 출퇴근하는 직원들을 위해 합승버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평소 합승버스를 자주 이용하던 구인회 사장에게 어느 날 한 임원이 택시나 자가용을 권했다. 그러나 구인회는 “사람들이 날 구두쇠라 불러도 내겐 칭찬같이 들리오. 옛말에 돈이란 벌기보다 쓰기가 어렵다고 했소. 합승버스가 있는데 뭣 때문에 휘발유 없애고 길바닥에 돈 뿌리며 택시를 탄다는 말이요”라며 손을 저었다. 그런 구인회였지만 일제 말기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 독립운동자금으로 당시로서는 거금인 1만 원을 선뜻 건네주었다. 점심 식사 때 좁은 골목길의 국밥집을 애용하는 소탈함을 지녔지만, 도움을 호소하는 주변에는 선뜻 거금을 내주면서 영수증도 받지 않는 일이 적지 않았다.

구인회의 사업 의지는 항상 국민 생활을 편하고 즐겁게 만들면서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남이 미처 안 하는 것을 선택하라. 국민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것부터 착수하라. 착수하면 과감히 밀고 나가라. 성공해도 거기서 머물지 말고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것, 한층 더 큰 것, 보다 어려운 것에 새롭게 도전하라”고 역설하였다. 럭키치약 하나만 보더라도 원가절감을 이유로 원료를 질이 낮은 것으로 바꾸어 사용한 일이 없었다. 럭키 제품을 선택해주는 소비자에게 언제나 더 좋은 품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꿈을 가진 기업인의 의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오래전부터 가족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구인회는 “돈을 벌기만 했는데, 사회에 기여하려면 무슨 방면에 쓰면 좋을까?”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구자경이 문화재단을 만들어 농촌지도자를 양성하고 싶다고 말하자, “농촌 지도자도 좋지만, 공업으로 나라를 일으키는 마당에 그 방면의 교수나 학생들을 도와주는 것도 시급한 게 아이가? 명색만의 도움에 그치지 말고···”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얼마 후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에 문화재단의 설립 계획서와 함께 허가원을 제출하였다. 재단의 사업목적은 학술, 문화, 기술 개발을 위한 장학육영사업과 사회복지사업 등으로 정하였다. 교육위원회를 거쳐 계획서를 검토한 정부는 구 회장의 뜻을 크게 환영하면서 문화재단 설립을 승인했다.  

구인회는 한번 결정하면 전력을 투입하고, 10년은 견뎌내야 한다는 선친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였다. 어떤 약속이나 한 번 하면 반드시 지켰는데, 결코 의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사돈이나 친구가 하는 일을 빼앗거나 훼방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는 것을 금기로 알았다. 기업의 정도(正道)는 창의와 노력으로써 새로운 부를 창출해나가는 것이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자본재에 투기함으로써 불로소득을 얻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확고한 신념이었다. 또 유교 가풍이 엄격한 집안의 장손으로 원칙을 중시하면서도 아랫사람에게는 다정다감하였다. 해외를 다녀올 때면 혁대나 넥타이, 넥타이 핀 같은 것들을 사서 아랫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게 하기도 했고, 몸이 아픈 직원이 있으면 한의사를 회사로 불러 진맥을 받게 하기도 했다. 친구나 부하에게 공을 돌리는 넓은 금도를 지녔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한 번 믿으면 모두 맡겨서 조언은 하지만 간섭은 하지 않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사람이 기업이고, 기업이 사람이니, 따뜻한 인간애로 사람들이 성과를 내도록 도움을 주는 일에 우선이었다. 팀워크와 책임 경영을 강조하면서 인화단결을 제일의 경영 이념으로 삼았다. 연암 구인회가 지켜온 삶과 경영철학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뛰고 있는 LG인들의 가슴 속에서 LG를 지속 성장시키는 핵심 가치로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