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남(上南) 구자경,
고객 가치 혁신으로 LG를 한 단계 도약시키다

상남 구자경 명예회장

구인회 창업회장의 뒤를 이어 1970년 1월부터 1995년 2월까지 만 25년 동안 LG의 2대 회장으로 재임한 구자경 명예회장은 대한민국의 작은 기업 LG를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선장이자 조타수였다. 그는 1950년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에 입사한 이래 20여 년간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경영 역량을 바탕으로 기술과 인재를 중시하였고, 필생의 업으로 여긴 경영혁신을 주도하며 자율경영을 정착시켰다. 더욱이 나름의 철학과 소신으로, 한창 원숙한 경지에 이른 70세에 은퇴의 용단을 내리고 젊은 세대에게 경영을 물려준 ‘참 경영인’이었다.

상남 구자경 명예회장

연암 구인회 창업회장의장례가 치러지고 있던 1970년 정초, 럭키그룹의 후계자 문제는 언론과 재계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재계 수위를 다투는 거대 그룹 총수의 자리를 누가 승계할 것인가? 그도 그럴 것이 구인회 창업주에겐 창업 때부터 고생을 나눈 6명의 아우들과 6남 4녀의 자녀들이 있었고, 동업 관계인 허씨 집안에도 쟁쟁한 인재들이 있었다. 일부에서 구씨와 허씨 집안 간 물고 물리는 다툼을 예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970년 1월 7일 드디어 열린 럭키그룹의 시무식. 그동안 연암을 도와 그룹을 이끌어 온 구철회 사장이 구씨 집안의 장손 구자경 부사장에게 식장 전면 중앙에 놓여 있는 회장의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부터 자네가 저 자리에 앉게.” 연단에 선 구철회 락희화학 사장은 추천사를 통해 창업 세대교체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이틀 후, 그룹 합동이사회는 구자경 부사장을 럭키그룹의 제2대 회장으로 공식 선임하였다. 더불어 창업 원로 세대도 용퇴함으로써 다음 세대의 인재들이 마음껏 경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당을 제공하여, 아름다운 경영권 승계를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 주었다. 

LG가 보여준 장자 승계의 원칙과 모범적인 경영권 승계의 가장 중요한 배경은 실력으로 인정받도록 혹독하게 이루어지는 후계자 수업에 있었고 그 토대는 ‘인화(人和)’였다. 훗날 구자경 회장이 집안의 장손인 구본무 3대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때도 이런 원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상남 구자경 명예회장

현장 경험으로 단련된 1.5세대 경영인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1925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부친 연암 구인회와 모친 허을수의 6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구자경은 유림에서 존경받던 증조부 만회 구연호 공의 사랑과 외유내강형의 선비로 유교의 전통과 신문화의 합리적 사고를 함께 지녔던 조부 춘강 구재서 공의 가르침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형제간의 우애와 근검한 생활을 중요시하는 가통 속에서, 특히 장남으로서 집안의 중심 역할이 가져야 할 ‘책임감’과 가족의 모범이 되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이렇게 자리 잡은 가치관은 경영활동에도 면면히 이어져 경영자로서 스스로에게 엄격함을 유지하는 한편, 항상 리더로서의 역할과 책임의식을 먼저 떠올렸다.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지수보통학교를 거쳐 부산사범대 부속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1950년, 부친의 부름을 받아 락희화학에 입사하여 서울의 화장품연구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뒤이어 발발한 6·25 동란으로 인해 연구 업무에 대한 아쉬움을 남긴 채 부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후 구자경은 주로 생산현장에서 직원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 럭키크림 생산을 직접 담당하면서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었고, 박스에 일일이 제품을 넣어 포장해 판매현장에 들고 나갔다. 하루걸러 숙직을 하며 새벽부터 몰려오는 도매상들을 맞았고,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공장가동을 준비했다. 판자를 잇댄 벽에 깡통을 펴 지붕을 덮은 공장에서 숙직할 때면, 판자 사이로 들어온 모래바람 때문에 자고 나면 온몸이 모래투성이였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허름한 야전점퍼에 기름을 묻히고 다니는 모습이 영락없는 현장 근로자였다.

흔히 경영수업이라고 하면 영업이나 기획 분야, 해외지사에서 몇 년간 실무를 보다가 기획조정실장 등을 거쳐 경영자로 나가는 것이 익숙한 관행이다. 이에 반해 구자경은 십 수 년 공장생활을 하며 ‘공장 지킴이’로 불릴 만큼 현장 수련을 오래 했다. 사람들이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에게 “장남인데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할 정도였으나, 구인회 창업회장은 “대장간에서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도 무수한 담금질로 무쇠를 단련한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를 게 없다”며 현장 수업을 고집했다.

구자경은 창업 초기부터 회사운영에 합류하여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을 도와 LG를 일궈온 1.5세대 경영인이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LG는 부산의 부전동공장, 연지공장과 동래공장, 초읍공장, 온천동공장 등 생산시설을 연이어 확장하며 화장품, 플라스틱 가공 및 전자산업에서 국가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구자경은 플라스틱 가공제품의 국내 최초 생산 현장은 물론, 금성사가 국내 최초로 라디오를 생산하는 과정도 직접 챙겼다. 이 땅에 화학공업과 전자사업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현장에서 몸소 겪은 것이다. LG의 어느 공장이든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공장에 따라서는 어느 상자에 어떤 공구가 들어 있고, 누가 어떤 작업을 잘 하는지도 훤히 꿰고 있을 정도였다.

상남 구자경 명예회장

전자·화학 산업으로 LG의 도약과
국가산업 고도화를 이끌다

갑작스런 선친의 타계로 2대 회장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구자경은 오랜 기간 현장에서 쌓은 역량과 자신감을 십분 발휘하여, ‘과연 거대한 그룹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라는 주변의 우려를 무색하게 했다.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문은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해 원천 기술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직계열화를 이루며 지금과 같은 LG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25년간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LG의 매출은 260억 원에서 30조 원대로 성장했고, 종업원도 2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증가했다.

1975년 구미 공단에 연산 50만 대의 대단위 TV 생산공장이 준공되면서 본격적인 컬러TV생산이 시작되었다. 당시 컬러TV는 국내 컬러 방송 시기가 미정이라 국내 시판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글로벌 기술 흐름에 뒤처지지 않고 해외 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전량을 미국 수출용으로 먼저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이후 우리나라 수출에서 가전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1976년에는 냉장고, 공조기, 세탁기, 엘리베이터, 컴프레서 등의 생산시설이 포함된 국내 최대의 종합 전자기기 공장인 창원공장을 건립하였다. 이어 1983년부터 1986년까지 미래 첨단기술시대에 대비해 컴퓨터, VCR 등을 생산하는 평택공장을 구축하며 오늘날 전자 산업 강국의 기틀을 닦았다.

화학분야에서는 1970년대 울산에 하이타이, 화장비누, PVC 파이프, DOP, 솔비톨 등 8개의 공장을 잇달아 건설하면서부터 종합 화학회사로의 발돋움이 본격화되었다. 또한 전남 여천 석유화학단지에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PVC레진, ABS, 납사 분해공장 등을 구축해 당시 호남정유의 정유부터 석유화학 기초유분 및 합성수지까지 석유화학 분야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1980년대 초반에는 충북 청주에 치약, 칫솔, 모노륨, 액체세제 등을 생산하는 생활용품 종합공장인 럭키 청주공장을 건립했다. 또 창업 당시의 사업영역이던 화장품 사업으로의 재진출을 결정하고 청주공장에 국내 최대 규모의 화장품 생산라인을 건설하였다.

상남 구자경 명예회장

21세기 선진 기업경영의 길 개척

구자경은 기업의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선진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실천한 혁신가였다. 국내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로 기업을 공개하였고, 국내 기업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던 해외 생산공장 설립을 과감히 실행하여 우리나라 기업경영의 질적인 성장 사례의 본보기가 되었다.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는 다가올 21세기를 주도할 수 있는 기업체질을 갖추기 위한 경영혁신 활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했다. 계열사 사장들이 ‘자율과 책임경영’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는 LG의 ‘컨센서스(Consensus) 문화’를 싹틔웠고, 철저한 ‘고객 중심 경영’을 표방했다.

우리나라 기업의 활동 지평을 세계로 확장시키는 데 앞장선 것도 구자경의 업적이다. 재임기간 동안 50여 개의 해외법인을 설립하였는데, 특히 1982년 미국 알라바마 주의 헌츠빌에 세운 컬러TV공장은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설립한 해외 생산기지였다. 해외투자에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독일의 지멘스, 일본 히타치·후지전기·알프스전기, 미국 AT&T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합작 경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대표적인 합작 성공사례로 1966년부터 시작된 호남정유와 미국 칼텍스 사와의 합작을 꼽을 수 있다. 50:50의 대등한 비율로 경영을 양분했음에도 상생과 조화라는 합작의 기본을 존중하고, 원칙을 공정하게 지키면서 한 치의 잡음 없이 합작경영을 이어왔다. 1974년 금성통신과 지멘스와의 합작도 선진기술을 배우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LG는 서로에게 합당한 원칙을 정하고, 투명한 경영을 통해 상호 신뢰를 구축함으로써 많은 합작법인을 운영하면서도 파트너와의 분쟁이 없이 합작사업의 국제적 모범을 보였다. 당시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던 많은 외국기업들이 사전 자문을 구하러 올 정도였다.

개방과 변혁이 소용돌이치는 1980년대를 겪으며 구자경은 위기감 속에서 스스로 경영혁신 방향을 수립하여 1988년 21세기 세계 초우량기업으로 도약을 목표로 한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이라는 변혁을 발표했다. 사업전략에서 조직구조, 경영스타일, 기업문화에 이르기까지 그룹의 전면적인 경영혁신을 담은 것으로, 특히 과도하게 회장 1인의 의사결정에 의존하는 관행화된 경영체제를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선진화된 경영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자율과 책임경영’을 절체절명의 원칙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1989년 어느 날, 의욕적으로 내딛은 자율경영의 힘찬 행보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가로막혔다. 당시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던 노사분규의 열풍이 마침내 럭키금성에도 불어닥친 것이다. 가족까지 앞세워 집단 상경한 노조 대표들은 회사 건물 주위를 둘러싸고 북과 징을 치며 회장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나섰다. “사장들은 실제 아무 권한도 없지 않습니까? 회장님이 확실한 대답을 해주십시오. 우리가 제시하는 안이 수락되지 않으면 모든 책임은 그룹 경영진이 져야 합니다.” 노조 대표들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교섭에 관한 전권은 각 사에 있으니 이러지 말고 각기 사장을 찾아가서 대화하세요. 사장이 안 된다면 나도 안 되고, 사장이 된다고 하면 나도 됩니다.” 구자경 회장은 단호했다. 노조원들은 돌아섰지만, 결국 각사는 연대파업이라는 뼈아픈 사태를 맞았다. 그토록 오랜 고민과 숙고를 거듭하여 그룹의 전 경영자와 함께 채택하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자율경영의 길은 그만큼 힘들고 어려웠다. 

노사분규의 후유증은 컸지만 그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각 사 사장들은 이제 더 이상 회장을 핑계 삼을 수 없게 되었고 임금협상은 각 사의 사정에 맞게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다. 희생과 고통을 견뎌낸 구자경 회장의 결단이 밑거름이 되어 자율경영 체제는 서서히 정착될 수 있었다.

상남 구자경 명예회장

경영이념을 액자 밖으로 끄집어낸 경영혁신

경영혁신으로 그룹의 새 비전을 실현해 가기 위해 임직원의 가치관도 새롭게 무장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연암 구인회의 창업정신이자 럭키금성그룹의 정신적 모토였던 ‘인화단결, 연구개발, 개척정신’은 어떤 경영 환경에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타당한 가치였다. 그러나 국경 없는 무한경쟁이 본격화되는 등 시대가 변화하면서 담고 있는 의미가 다소나마 퇴색한 듯한 느낌이 있었고, 때로는 자의적으로 해석되어 오히려 건전한 조직풍토를 해치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 구자경 회장의 제안으로 경영이념에 대한 개정 논의가 시작되었다. 사장 14명을 포함한 25명의 경영자들이 머리를 맞대었지만 진척은 매우 더뎠다. 하염없이 논의의 결과만을 기다릴 수 없게 되자 구자경 회장은 논의의 범위를 그룹의 사업 전개 방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가치관으로 좁힐 것을 제안했고, 어렵게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종전의 개척정신, 연구개발이라는 두 항목의 이념을 진일보시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라는 개념으로 묶어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사업운영의 철학으로 정립하였다. 인화단결의 정신은 어떻게 하면 조직을 잘 움직여 사업을 성공시킬 것인가에 대한 조직운영 철학의 관점에서 ‘인간존중의 경영’이라는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제정하였다.

구자경이 무엇보다 고민한 것은 새롭게 재정립된 경영이념이 선언적 의미만으로 액자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닌 실천적 행동의 지침으로 자리매김하는 방안이었다. 경영혁신이 선언에 그치지 않도록 구자경은 직접 혁신 전도사 역할을 자처했다. 2년에 걸쳐 그룹 전 임원 500여 명과 오찬을 했고, 어느 해에는 임직원 간담회 형태의 대화 자리를 140차례나 가졌다. “고객에게 미친 영감”으로 낙인찍힐 정도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에 정성을 들였다.

매년 4월을 ‘고객의 달’로 선포하여 한 달 동안 각 사마다 다양한 고객의 달 행사를 실시하게 하고, 구자경 회장도 현장에 나가 고객의 소리를 직접 들었다. 격식 없이 금성사 서비스센터를 찾아가 방문 고객의 불편사항이나 의견에 몸소 귀 기울이곤 했다. 내부에서는 결재란에 ‘고객결재’칸을 회장 결재 칸 위에 만들고, 회의실마다 ‘고객의 자리’를 마련했다. 무슨 일을 하든 항상 고객을 생각하고 모든 회의에서 고객의 의견을 최고로 존중하겠다는 문화를 만들어갔다. “고객의 입장에서 듣고 생각하라. 이것이 혁신이다”라는 말을 강조하며 직접 실천해온 것이다.

인간존중의 경영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그룹에 ‘인재개발위원회’를 설치하고 인화원을 건립하여 교육과 훈련을 통한 인재육성, 자기개발의 기회를 넓히는 실천 여건에 주안점을 두었다. 직속상사 중심의 인재육성, 능력과 업적에 의한 대우,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육성, 사람에 대한 믿음과 진정한 애정 등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상남 구자경 명예회장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의
믿음이 만든 ‘기술의 상징’

구자경은 그룹 회장으로 재임한 25년간 특히 ‘기술입국(技術立國)’의 일념으로 전자와 화학 분야의 연구개발에 열정을 쏟아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수많은 국내 최초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 LG의 도약과 우리나라의 산업 고도화를 이끌었다. 70년대 중반 럭키 울산 공장과 여천 공장에는 공장이 채 가동되기도 전에 연구실이 먼저 만들어졌다. 그는 각 공장별로 소규모 연구실을 운영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1976년 국내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토록 했다. 1974년에는 제품개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산업 디자인 분야의 육성을 위해 금성사에 디자인 연구실을 발족시키고 일본 등 디자인 선진국에 연수를 지원하는 등 전문가 육성에 힘썼다.

1979년 당시 정부는 산업화 과정에서 기술의 낙후성을 절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대덕에 대규모 연구단지를 조성하여 민간기업의 입주를 권장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대부분 기업들은 연구단지 입주를 놓고 투자 자체를 기피하던 시절이었지만 럭키는 대덕연구단지 내 민간연구소 제1호로서 럭키중앙연구소를 출범시켰다. 여기서는 고분자, 정밀화학 분야를 집중 연구하여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ABS수지 등 다양한 신제품 개발로 플라스틱 가공 산업의 기술 고도화를 이끌었다. 1985년에는 금성정밀, 금성전기, 금성통신 등 7개사가 입주한 안양연구단지를 조성하였다. 같은 해 우리나라 최초로 개설된 제품시험연구소는 가혹환경 시험실, 한냉·온난 시험실, 실용 테스트실 등 국제적 수준의 16개 시험실을 갖춰 금성사 제품의 품질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했다.

기술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구자경이 지수초등학교 교사였을 때부터 싹텄다. 미래에는 틀림없이 기술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 믿고, 기술력 양성을 교육 중점목표에 넣었다. 연구소가 없었던 시절 구 회장이 공장을 순방해서 가장 먼저 보고 받는 것이 신제품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는 시간이 나는 대로 현장의 연구진들을 만나, 신제품 개발의 진전과 애로사항을 파악하여 즉각적인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구자경은 늘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거기에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결합하여 철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은 기업인들이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외쳐댈 때에도,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의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회장에 재임하던 25년 동안 ‘연구개발의 해,’ ‘기술선진,’ ‘연구개발 체제 강화,’ ‘선진 수준 기술 개발’ 등 표현은 달라도 해마다 빠뜨리지 않고 ‘기술’을 경영 지표로 내세웠다.

이러한 기술 연구개발에 대한 신념 뒤에는 우리 기술로 우리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우리나라의 산업과 기업의 수준을 한층 선진화해야겠다는 비장한 사명감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재임 내내 이어진 그의 실천적 노력은 R&D 인재를 중시하는 LG 기업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기술 연구개발에 대한 남다른 열정 때문이었는지 은퇴를 석 달여 앞둔 1994년 11월, 구자경은 나흘에 걸쳐 전국 각지에 위치한 연구소 19개소를 일일이 찾아 둘러보았고, 훗날 그때 심정을 ‘마음이 흐뭇함으로 가득 찼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상남 구자경 명예회장

인재를 사랑하고 육성에 힘을 쏟다

“인재 육성은 기업의 기본 사명이자 전략이요, 사회적 책임이다.” 1988년 11월 29일 LG의 종합 연수원인 인화원 개원식에서 구자경 회장은 이렇게 천명했다. 교사 시절에 지녔던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면 기술을 지닌 인재가 필요하다는 교육자로서의 소신은, 경영자로서 기술과 인재를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인재를 기르지 않고는 아무리 유망한 사업이더라도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인재 육성 철학은 인화원 설립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

인재와 교육에 대한 구자경 회장의 관심은 LG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주로 LG연암문화재단을 통해 1969년 진주시에 진주시립연암도서관을 기증하고 지원한 사업을 필두로 장학 사업, 해외연구교수 지원 사업, LG아트센터 운영 사업, 교육기관 지원 사업 및 LG상남도서관 운영 사업 등 교육과 문화 발전을 위한 다양한 공익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오고 있다. 장학 사업의 경우, 1970년부터 30여 년 동안 학업 성적은 우수하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2,500여 명의 대학생에게 등록금 전액과 교재비를 지원하였으며, 2001년부터는 대상을 대학원생으로 변경하여 인문·사회계 및 자연계 전공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나라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 교수들이 해외에 나가서 견문을 넓히고 연구를 하고 와서 인재들을 더 많이 길러야 한다는 취지에서, 1989년 6월에 처음으로 해외연구 교수를 선발하여 연구 활동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해마다 25명에서 30명에 이르는 교수들에게 국내 최고 수준의 현지 체재비와 가족을 포함한 왕복 항공료 등을 제공해왔다.

구자경 회장은 ‘우물 안에 큰 고기가 없고 새로 가꾼 숲에는 큰 나무가 없다 (新林無長木)’는 옛말을 강조하곤 했다. 이런 철학을 계승하여 LG는 지금도 우리의 인재들이 큰 고기가 될 수 있게, 또한 우리의 교육이 큰 숲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희망과 격려를 주는 지원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상남 구자경 명예회장

아름다운 용퇴, 영원한 자유인

선친의 갑작스런 타계로 경영권 승계 준비에 대한 아쉬움이 있던 구자경 회장은 “70세가 되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70세가 되던 1995년 2월 장남 구본무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함으로써 재계 첫 무고(無故) 승계라는 의미 있는 선례를 만들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장남 구본무도 1975년부터 20년 동안 그룹 내 여러 현장을 두루 거치면서 후계자 수업을 받게 하였다. 변함없이 적용된 장자 승계 원칙과 혹독한 후계자 수업은 조용하면서도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의 비결이었다. 

구자경 회장은 ‘멋진’ 은퇴보다는 ‘잘된’ 은퇴가 되기를 기대했다. 그것은 육상 계주에서 앞선 주자가 최선을 다해 달린 후 바통 터치를 하는 것처럼, 최고 경영인으로서 25년을 달려왔으면 주자로서의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서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바통 터치가 이루어졌을 때 ‘잘됐다’는 표현이 어울리듯, 경영 승계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임사를 끝으로 퇴임하는 원로 경영인들과 함께 임직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식장을 빠져 나간 것도 완전히 경영에서 손을 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자는 의도였다. 구자경 회장의 은퇴와 함께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온 허준구 LG전선 회장,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유에너지 회장 등 원로 회장단들도 동반 은퇴했다. 새로 취임하는 회장과 젊은 경영진이 독자적으로 소신 있게 경영 활동을 펴도록 배려한 것이다. 25년 전 2대 회장 취임 때 만들어진 아름다운 경영권 승계라는 LG의 귀한 가치가 다시한번 드러난 사례였다.

은퇴 후 구자경은 평소 갖고 있던 소박한 꿈이었던 분재와 난 가꾸기, 버섯 연구에 정성을 기울이는 등 회사생활 50년 만에 맞은 자유인의 삶을 자연 속에서 충실히 누리고 있다. 평소 생명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의 꿈을 향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을 피력하곤 했던 그는 이러한 생각을 실천하듯 경영자의 삶에서 은퇴한 이후 ‘영원한 자유인’으로 충실하고도 아름다운 자화상을 만들어가고 있다.